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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섬세한 언어의 필요성
    카테고리 없음 2024. 3. 31.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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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보다 높은 월급을 받고 워라밸이 좋은 이들이 업무환경을 탓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스스로 선택해 놓고 왜 이제 와서 남 탓일까’라는 마음의 소리가 올라왔죠. 나의 마음에 박힌 가시가 타인을 찌르기 시작한다는 건 그만큼 나의 삶에 여유가 없다는 뜻이라는 걸 저는 그렇게 깨달았습니다.

     

     

     

    한때 우리 사회에 ‘누칼협’이란 단어가 존재했죠. 지금도 그리 달라지진 않은 것 같습니다. ‘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의 줄임말이죠. 이 말이 어떤 마음에서 나오는 말인지 알 수 있었기에 더 아프게 들렸던 단어이기도 합니다. 특정 문제로 불평불만을 일삼는 이들에게 ‘어차피 당신이 선택한 것이고 누가 칼 들고 협박한 것도 아닌데, 왜 그리 불평이 많냐’라며 상대방을 타박하는 언어로 사용됐죠.

     

    공무원들의 임금 인상 시위에도, 화물연대 파업 시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불합리한 사회구조와 부조리한 업무 환경에 누군가 목소리를 내는 순간, 그와 나 사이에 날카롭게 선을 그어버리려는 마음. 철벽 같은 마음은 상대방을 가장 빠르고 잔인한 방법으로 침묵시켜 버리는 수단이었습니다.

     

    감정을 공유하는 수고가 사치인 시대가 온 걸까요. 냉소주의가 만연한 사회라지만, 또 한쪽에선 언어감수성을 기르자는 목소리가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 네 사정이 어떤지 내 알 바 아니다, 라고 다그치고 싶어질 만큼 에너지를 소진해 버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수록 우리에겐 좀 더 세심한 시선, 마음을 읽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선을 행하되, 선은 지켜야 하는 극한 배려 사회가 왔다. 우리는 갈등의 맥락을 재배치하는 더 나은 언어를 설계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에 데이터 과학자 송길영은 이런 대답을 내놓습니다. ‘무례하면 세상이 좁아집니다. 섬세한 조직, 세심한 인간이 살아남습니다.’ 그리고 세 가지 키워드를 꼽죠. 유리한 다양성, 관계의 돌봄, 건강한 긴장. 아마도 한동안 우리 사회를 관통할 단어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수년 전에 일본에서 벌어졌던 혐한 시위를 취재한 적이 있습니다. 조선인은 꺼져라, 더러운 조선인들, 같은 말들이 울려 퍼지고 일장기와 전범기가 물결치는 시뻘건 행렬이 몇 시간 동안 진행됩니다. 그런데 그 도로 한편에 굉장히 소수이지만, 이런 시위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굳건하게 자리를 지켜요. 카운터 스라는 시민단체입니다. 전범기와 일장기 대신 스마일 마크가 그려진 피켓을 들고 혐오 발언을 반대하는 취지로 서있는 사람들이죠. 법적으로 경찰이 보호해야 하는 건 집회신고자겠죠. 우익단체가 행진할 도로에 카운터스가 드러누워요. 혐한집회를 막기 위함이죠. 하지만 경찰은 도로에 더러운 카운터스를 짓밟고 때려서 도로 밖으로 밀어냅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정말 궁금해졌어요. 저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까지 자신을 희생할 수 있을까. 당연히 한국에 우호적인 사람들일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그들 대부분 SNS로 모이는 개개인인데요. 서로의 이름이나 직업을 공유하지 않는 그저 평범한 일본의 시민들이었죠. 다만 공통점이 있다면 ‘소시민으로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라는 목소리를 낸다는 점이었어요. 사회적 약자에게 화살이 향하고 혐오를 담은 시선이 가해지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는 점에서 모두가 동의하고 있던 거죠. 그 화살이 언제든 나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한국에 대한 감정과는 별개로요.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할 때 그 관대한 시선은 나에게 똑같이 돌아옵니다. 횡단보도 위 거동이 느린 고령자에게 울리는 가차 없는 경적은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나에게 울릴 경적이죠. 알빠임? 누칼협, 같은 단어들이 그어버린 경계선은 어느 순간 내가 설 곳 없는 경계선으로 돌변합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비판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긍정적인 말에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세상에 건네고 있는 시선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을 살피는 마음이 귀하고 빛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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